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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손기정 공원 앞인데요.”
왜 오지 않느냐고 클럽장인 명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을 때 기정은 이렇게 말했다.
“기정님. 손기정 공원이 엄청 커요. 저희 트랙에서 만나기로 했었잖아요.”
트랙까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으려다가 기정은 손기정 공원의 전체 지도를 발견했다. 명주 말대로 정말 크긴 컸다. 지금 기정이 위치한 곳은 손기정 어린이도서관 앞이었으므로 테니스장을 지나 게이트볼장을 지나 체력 단련장까지 가면 되었다. 트랙의 시작점이 체력 단련장이었으므로.
그들은 이미 뛰고 있을 것이다. 매주 목요일 밤 9시에 모여서 함께 러닝을 한다. 크루가 다 오지 않더라도 세원정공 밤 9시가 되면 무조건 뛴다. 마지막 주는 러닝을 하고 나서 독서 모임을 한다. 이게 ‘뛰는 사람들’의 회칙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마지막 주 목요일이었다.
기정이 그날 을지로3가에 있는 노가리 골목에서 맥주를 마시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뛰는 사람들’이 빨간 플라스틱으로 된 탁자와 의자가 놓인 야장으로 뛰어오는 걸 보지 못했더라면, 또 주식대출한도 ‘뛰는 사람들’이 마침 기정의 옆 테이블에 앉아 을지로3가의 옛 이름인 황금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지 못했더라면, 모두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었다.
“카본 운동화가 뭐가 중하냐는 거지. 킹정님은 거의 맨발로 황금정을 뛰셨는데.”
러닝을 할 때 ‘장비빨’을 세우기보다 본질이 중요하다는 걸 역설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클럽 신축빌라매매 장인 명주였다. 열 명 정도인 크루들이 무척이나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서 기정은 그들은 뭘 신었는지 볼 수밖에 없었다. 아식스와 나이키도 있었지만 살로몬에 호카에 온러닝, 그때 아직 한국에 론칭하지 않았던 알로를 신은 사람도 있었다. 재밌네. 기정은 그들에게 호감이 생겼다.
뛰는 사람들. 그게 모임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군인의하루 말한 ‘킹정님’이란 손기정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기정에 ‘킹’을 붙여서 킹정님이라며 그들은 마라토너 손기정을 우러르고 있었다. 맨발로 뛰다시피 해서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사람이라며 손기정이 사실 한국 최초의 수퍼스타가 아니냐고 했다. 2시간 29분 19초로 신기록을 세우며 들어온 것보다 놀라운 것은 결승점을 통과할 때 손기정이 힘이 남아돌았다는 점이었 채권담보대출 다고도. 마지막 100미터의 기록이 12초라며.
“베를린 올림픽 시상식에서 기테이 손이라고 호명되잖아. Kitei Son. 완전 슈퍼스타 K의 탄생인 거지.”
“그러네, K의 원류네.”
“기테이는 일본식 이름이잖아?”
“그때는 억지로 이름을 바꿔야 했잖아. 1936년이니까.”
그들의 이야기에 ‘기정’이 등장할 때마다 기정은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도 기정이었으니까. 성은 정이었지만 이름은 기정이므로 어릴 때 별명은 늘 손기정이었다. 손기정 옹이거나 기정 옹. 차라리 기정떡이 나았다. 기정떡을 아는 애는 거의 없어서 기정떡이라고 불린 적은 거의 없지만.
나도 그때 태어났으면 기테이 정이 되는 거였나? 여자 이름은 다른 식으로 바꾸나? 하지만 기정은 달리기를 못했다. 그냥 못하는 게 아니라 아주 못했다. 그래서 손기정이라고 불리는 게 치욕으로 느껴졌고 달리기를 할 때면 더 움츠러들었다.
‘뛰는 사람들’을 인스타그램에서 검색하니 런런클럽이 나왔다. runlearnclub이 뛰는 사람들의 영문명이었다. 계정의 프로필 이미지에는 이 문장이 있었다. ‘뛰고 배우고 뛰자’. 프로필에는 ‘매주 목요일 9:00PM / 8km 달리기 / 장소는 서울 어딘가 출발 / 주로 뛰고 가끔 읽습니다’라는 클럽의 정보가 있었다.
기정은 런런클럽에 DM을 보내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 러닝화와 지금 읽고 있는 책 한 권을 함께 사진으로 보내면 다음 러닝 장소를 공지해준다는 답을 받았다. 민트색 룰루레몬 운동화와 《올해의 스니커즈》라는 책을 찍어서 보냈다. 패션과 책으로 자신을 특정하고 싶지 않은 기정이 애써 고른 중립적인 코드였다. 룰루레몬처럼 대중적인 브랜드의 러닝화를 신지만 모노톤이 아닌 민트를 신는다는 걸 인증함으로써 그렇게 무미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걸 살짝 드러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 야장의 옆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사실 기정이 보고 있는 책은 손기정이 쓴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이었지만 알리는 건 민망했다. 손기정이 한민족의 영웅이라는 것만 알았지 별로 궁금하진 않았으나, 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궁금해져서 읽고 있었지만.
트랙에 도착했을 때 뛰는 사람들은 뛰고 있었다. 꽤 큰 축구장을 감싸고 있는 저 트랙의 길이는 어느 정도일까? 기정은 아직 거리에 대한 감이 전혀 없어서 저 정도 트랙을 몇 바퀴 돌아야 8km가 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기정을 발견한 크루 중 누군가 이쪽으로 합류하라고 손짓했다. 세 번째 참석인데 기정이 아는 사람이 네다섯은 되었다. 그들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며 기정은 맨손체조를 하기 시작했다. 팔을 360도로 회전하며 돌리는 동작과 다리를 접었다 폈다 하며 아킬레스건을 풀었다. 뛰는 사람들에 들어오고 나서 혼자서도 달리기를 시작한 기정이 달리기 전에 늘 하는 동작이었다.
“무조건 양보 아시죠?”
앞에서 뛰던 크루가 기정을 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 기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러닝 크루가 민폐 크루라는 말을 많이 듣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지 말자며 그들이 강조하는 게 양보였다. 크루들 사이에 크루가 아닌 사람들이 끼어들려고 하면 그냥 끼워주고, 먼저 가려고 하면 먼저 가게 하고 하자고. 양보라는 걸 해보니 신선했다. 이전까지 기정은 그런 상황에서 양보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지금 달리기로 승부를 보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심신 안정하자고 달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심신을 침해하면 안 되죠.”
크루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몇 바퀴째인지를 세다가 더 이상 세기를 잊었을 때 기정은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숨이 턱턱 차오르고 입에서는 쇠맛이 나는 것 같았다. 8km 달리면서 무슨 쇠맛이 나냐고 비웃는 사람도 있겠으나 달리기에 익숙하지 않은 기정은 그랬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겠다 싶을 때 클럽장은 8km를 다 달렸다고 말했다. 더 달리고 싶으시겠지만 이제 손기정 나무를 보러 가자고 했다. 밤 10시가 넘어 있었다.
경사진 길로 올라갔더니 바로 그 나무가 있었다. 손기정이 받은 월계수 화분을 가져와 심은 게 저렇게나 컸다고 했다. 기정과 크루들은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서 빛으로 나무를 훑어 올라갔다.
“와, 월계수가 저렇게 커요?”
“월계수 아니라 참나무랍니다.”
못해도 10층 건물 정도 높이는 될 것 같았다. 1936년에 독일에서 묘목을 가져와 심은 나무가 이렇게나 자랐다는 데 기정은 놀랐다. 크루들도 그런 것 같았다. 손기정 공원은 손기정이 다녔던 양정학교 터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번 책 모임은 책을 정하지 말고 각자가 손기정에 대해 조사한 것으로 대신하자고 클럽장이 이야기했을 때 기정은 꼭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킹정님이 연습했던 코스 알면 그대로 해보는 게 어떨까요?”
누군가가 말했다.
무려 세 코스나 자신이 쓴 책에 밝혀두었기에 기정은 손기정이 달리기 연습을 했던 코스를 알고 있었다.
“양정학교에서 시작하는 코스를 알아요.”
“오오.”
자기들이 있는 데서 시작한다는 것에 크루들은 흥분한 것 같았다.
“남대문을 지나 황금정, 그러니까 을지로를 지나 동대문을 지나 창경원을 지나고 돈화문을 지나서 총독부, 그러니까 경복궁을 지나 광화문을 지나 경성부청, 그러니까 신세계백화점을 지났던 코스요.”
“오오오….”
크루들은 다시 환호를 질렀는데 이번에는 약간 걱정 섞인 환호였다. 피할 수 없는 뭔가가 다가온다는 것을 직감한.
“‘내가 손기정이다’ ‘내가 슈퍼스타 K다’ 이런 마음으로 뛸까요? 자!”
클럽장답게 명주가 말했다.
손기정 공원에서 아래로 내려오자 나온 길의 이름은 손기정로였다. 뛰는 사람들은 손기정로를 뛰고 있었다.
공동기획: 조선일보·국가보훈부



손기정(1912~2002)
평북 신의주 출신으로 신의주제일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8월 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올림픽 신기록(2시간 29분 19초2)으로 금메달을 땄다. 일본 선수단으로 출전했지만 스스로 “코리안”이라고 밝히고, 사인도 한글 이름으로 했다. 광복 후 마라톤 선수 육성에 기여했다.



소설가 한은형
2012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레이디 맥도날드>, <서핑하는 정신>, <거짓말>과 소설집 <어느 긴 여름의 너구리> 등을 썼다. 에세이 <우리는 가끔 외롭지만 따듯한 수프로도 행복해지니까> <밤은 부드러워, 마셔> 등 미식과 술에 관해서도 썼다. 2015년 한겨레문학상을 받았다.